Lutris
마지막 수정 시각: 2023-06-01 11:28:31
처음 형과 함께 게임을 만들기로 한 건 2015년 여름 즈음의 일이다. 나는 NEXT를 다니면서 계속 언젠가는 인디게임을 개발해야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사실 의지력이 좋은 편은 아니어서 제대로 게임을 완성하지는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과연 혼자서 내가 게임을 잘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자주 했었고. 아트든 기획이든 개발이든 다 혼자서 해내기 위해 나름대로 책도 보고 연습도 하고 어떻게든 꾸준히 노력은 하고 있었지만(도트 작업물 모음 에서 혼자 연습해왔던 도트 작업을 볼 수 있다), 모든걸 1인 개발로 해내긴 버겁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2015년은 형이 군대에서 제대한 직후였다. 형은 원래도 진로에 고민이 많았는데, 군대를 갔다오고 나서 더 진로에 대한 고민이 많아진 것 같았다. 형은 행정학과를 다니는 중이었다. 근데 고시를 준비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고 설령 합격한다고 해도 공무원 같은 일이 적성에 잘 맞는지도 모르겠어서 그 일을 하는게 행복할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었다. 그러던 와중에 나도 내 나름대로 혼자 게임을 만드는 것에 대해 고민이 있었다보니 이야기를 하다 같이 게임을 만들어보는 건 어떨까 하는 결론이 나왔다. 어렸을 때부터 같이 게임도 많이 해봤고, 성격도 잘 맞으니 같이 게임을 만들면 재미도 있을 것 같았고, 일도 잘 진행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당장 다 때려치고 게임을 만드는 거에 올인을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나도 나대로 학교를 졸업하려면 아직 반 년 넘게 남은 상황이었고, 형도 형대로 게임을 만드는 것과 전혀 상관없는 일을 하다 갑자기 게임을 만들기로 한 거니 공부가 필요한 상황이었으니까. 그래서 일단 형은 학기를 휴학하고, 한 반 년동안 틈나는대로 같이 게임을 이것저것 만들어보면서 아트 관련 공부도 하는 식으로 진행하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게임 팀을 결성하게 됐고, 이름은 Lutris로 정해졌다. 둘 다 해달을 좋아해서 해달의 학명에서 따와서 정한 이름. 로고도 해달 얼굴에서 따서 그렸었다.
기세좋게 시작했고 계획은 좋았으나 당연히 현실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다. 나의 경우 학교 과제도 많고 빡센데다가, 학교에서 집까지 통학만 왕복 2시간이 넘게 걸리는 거리라는 점까지 겹쳐서 학교를 다니면서 뭔가 게임을 본격적으로 만들긴 무리가 있었다. 형도 형대로 게임 개발 과정에 대해 그다지 접한 것이 없는데 내가 정신이 없으니 제대로 같이 뭔가를 진행할 만한 형편이 안 됐고. 그래서 그 반 년 동안은 뭔가 결과물이랄게 나오진 못 했고, 어영부영 게임을 만들다 접다 만들다 접다만 반복했던 것 같다. 그 와중에 형은 혼자 학원을 다니거나 유튜브 등으로 강의 영상을 보면서 나름대로 아트에 대한 기반을 좀 쌓기는 했었다.
그렇게 반년이 더 지나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원래 바로 병역 문제도 해결할 겸 취업을 하려고 했던 걸 미루고 한 반 년 정도 같이 게임을 만들어 본 다음에 취업을 하기로 결정했다. 뭔가 하나 만들어보지도 못하고 바로 회사에 들어가면 너무 아쉬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졸업 후 처음 만들어서 출시까지 이어졌던 프로젝트가 바로 전 편에서 다뤘던 The Hole. 2016년 2월즈음부터 한 달만에 완성을 했었다. 당시 자취하던 곳이 형이 다니던 학교 근처였는데, 집에서는 집중이 잘 안 돼서 낮에 학교 도서관에 가서 개발을 하고 그랬던 기억이 난다.
졸업 후에 첫 프로젝트로 The Hole을 선택했던 이유는 다음 두 가지가 컸다.
- 이미 기획이 완성되어 있는 게임이어서 기획을 가지고 고민을 할 필요가 없다. 일단 게임을 제대로 완성해서 출시해보는 경험을 쌓고 싶었고, 그래서 기획 단계에서 오래 고민을 하기보단 바로 개발에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 퍼즐 게임이라 상대적으로 아트를 만들기가 편했다. 원래 생판 아트랑 관련 없던 사람이 반 년 공부하고 게임 아트를 담당해야하는 상황이었으니, 최대한 간단한 아트 만으로도 개발할 수 있는 게임이어야 했다.
실제로 한 달만에 잘 완성해서 출시까지 했었고 이 경험이 이후 게임을 개발하는데 있어 아주 컸기 때문에 훌륭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만들 당시에는 스스로 너무 잘 만들었다고 생각을 했었고, 대박 나면 어떡하지~ 같은 소리를 했었으나, 당연히 출시하고 나서 대차게 망했다. 지금도 게임 플레이 자체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게임의 완성도가 너무 낮아서 성공할 수가 없는 게임이었다. the hole은 항상 아쉬워서 언젠가는 리메이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만.. 할 수 있을 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일단 완성까지 이어진 경험이 너무 좋았어서 하나쯤은 더 게임을 만들어보고 취업을 하기로 했다. 이 때 나는 졸업했고, 형은 휴학 중이라 굳이 서울에 있을 이유가 없어서 잠깐 지방에 있는 본가로 내려가서 게임 개발을 진행했다. 그 때 생각으로는 한 반 년 정도 시간을 쓰면 작은 게임 하나, 잘하면 두 개 정도는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짧은 시간 안에 게임을 완성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는데, the hole을 빠르게 완성한 기억에 도취돼서 잘못된 판단을 했던 것 같다.
그렇게 본가에 내려가서 부모님이 차려주시는 밥을 먹으며 굉장히 마음 편하게 게임 개발을 했다. 이제 다시 처음부터 게임 기획을 해야하는 시점. the hole은 기존에 가지고 있던 기획으로 진행했으니 괜찮았지만, 새로 게임을 만들려고 하니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것부터가 일이었다. 당시에는 특히나 게임을 만들고 기획하는 과정에 대한 감각이 부족해서 어떤 경험을 주고 싶은지를 명확히 생각하지 못해 더 어려웠던 것 같다.
이 때가 2016년 초인데, 당시에는 한참 로그라이크 장르가 유행하던 때였다. 나는 기존에 Rogue Legacy라는 게임을 재밌게 했었고, 당시에는 Pixel Dungeon이라는 게임을 즐기는 중이었다. 이 두 게임에 강하게 영향을 받아서 픽셀 던전과 비슷한 스타일의 로그라이크 게임을 만들어보자는 얘기를 했고, 그렇게 해서 만들기 시작했던 것이 Twilight's Children 이라는 게임이었다.
Twilight's Children
당시 만들던 게임의 스크린샷. 이 때에는 스팀에 출시하기가 지금보다 훨씬 힘들기도 했고 그 정도 규모의 게임을 만들 엄두도 안 나서 모바일게임 개발만 고민했었다. Twilight's Children은 초등학교 미스터리 동아리를 배경으로 하는 로그라이크 게임으로 기획했다. 초등학교 미스터리 동아리의 회원중 신내림을 받은 무당 집안 아이가 한 명 있었고, 이 아이가 집에서 호신용 부적을 들고 와서 동아리원들에게 그 부적을 나눠주게 된다. 동아리 부원들은 호신용 부적을 테스트할 겸 해서 밤에 귀신이 나오는 것으로 유명한 장소들을 탐사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일을 다루는 것이 게임의 내용.
큰 틀에서 게임의 전투는 당시에 재밌게 했던 Pixel dungeon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Pixel dungeon과 비슷한 방식의 탐사를 진행하되, 한 턴에 한 번씩 번갈아가며 전투를 진행하는 시스템이 아니라 에너지 개념이 있어서 플레이어는 턴당 그 에너지만큼의 행동을 수행할 수 있다는 정도의 차이만 가진 기획. 그리고 밤 중에 탐사를 하고 낮 중에는 동아리 부원을 모으고, 강화하는 등의 활동을 하며, 캐릭터마다의 기질(ADHD, 신내림, 다혈질 등)을 가지는 Darkest Dungeon에서 영향을 받은 성장 시스템을 생각했었다. 또 밤 중에는 던전의 구조가 고정되며 동이 트기전에 탐사를 마쳐야하고 그렇지 못하면 던전 구조가 초기화되는 던전 고정과 같은 시스템은 Rogue Legacy에서도 영향을 받았다. 보면 알겠지만, 게임의 각 구성 요소들이 당시에 재밌게 했던 게임에 모두 영향을 받았고, 이 게임으로 인해 전달하고 싶은 경험이나 목적 구조가 없었다. 단순히 흥미롭다고 생각한 컨셉에 내가 재밌게 했던 게임 플레이를 적당히 섞어서 얹어놓은게 끝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당연히 만들다보니 게임은 재미가 없고 어디를 고쳐야할지도 모르겠고... 한참 표류하다 결국 개발을 중단하게 된다.
Esports Manager
그리고 그 다음으로 생각했던 것은 Esports Manager. 이 게임을 만들었던 경험이 아주 먼 미래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 그 일은 따로 더 자세하게 써야할 것 같으니 여기서는 잠깐 미뤄두자. 아무튼 게임을 한 번 두 달 가까이 만들다 엎고 나니, 안 좋은 기분이 다시 스멀스멀 기어올라왔다. The hole을 만들기 전에 학교를 다니면서 만들고 접고 했던 상황이 반복이 될 것만 같은 느낌. 결국 이번에도 우리 수준에 맞지 않은 복잡하고 어려운 기획을 시도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상업성을 떠나서 좀 더 직관적으로 우리가 하고 싶은 게임을 만들어보는 방향으로 접근해보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형과 나는 롤 경기에 아주 열성적인 팬이었고, 경기를 보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FM처럼 롤 경기의 감독이 되는 게임이 없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 생각을 그대로 옮겨서 만들어보던 것이 바로 Esports Manager. 시간이 흘러서 실제로 그 플레이를 할 수 있는 모바일 게임이 나왔다는 걸 생각하면 참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아무튼 그런 기획을 생각하고 열심히 만들었지만 당연히 이건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일단 시뮬레이션 단계에서 도저히 그 많은 챔피언의 상호작용과 롤의 복잡한 플레이를 옮길 수가 없었고, 결국 낑낑대면서 시뮬레이션만 한참 건드리는 사이 시간은 흘러 취업을 할 시기가 오고야 말았다. 결국 몇 개월동안 열심히 이것저것 시도는 했으나 얻은 것은 없는 채로 다시 서울로 올라오게 된다.
취업, 그리고...
서울로 올라오고 나서, 2016년 6월즘부터 시작해서 2020년 1월까지 약 3년 6개월동안 회사를 다니며 병역 문제를 해결하게 된다. 운이 좋게도 같은 회사에 형과 함께 들어가서(나는 프로그래머, 형은 기획자) 굉장히 좋은 사람들과 함께 나름대로 즐겁게 회사 생활을 하며 병역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회사에서 한 일들도 이후 게임을 만드는 과정에 많은 도움이 됐고 여러가지로 기억에 남는 일들이 많지만 어쨌든 회사에서 한 일은 내가 함부로 적기는 좀 그럴 것 같아서 생략해야할 것 같다. 회사의 일은 회사의 중요한 자산이고 그걸 퇴사한지도 한참 된 내가 함부로 적으면 안 되는 일이니.
그러니 회사에서 한 일보다는 회사에 다니는 기간동안 시도했던 수많은 게임들의 실패와 관한 이야기를 위주로 좀 다뤄보자. 회사에 다니면서 나와 형은 퇴근하고나서 꾸준히 이런저런 게임을 만드는 시도를 했는데, 완성한 게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하나같이 습작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 시기동안 했던 수많은 게임 개발 과정과 그 실패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 편에 이어서 계속.
- 목차: 게임 만드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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