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시절
마지막 수정 시각: 2021-08-02 22:49:29
1학년
일반적인 한국의 인문계 고등학교 환경은 프로그래밍을 공부하고 게임을 개발하는데 별로 좋은 환경은 아니다.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코딩에 상당히 열정적이었던 나는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한동안 코딩은 거의 손도 안 대게 됐었다. 다른 게 아니라, 코딩을 하고 싶어도 할 체력이 없었다. 보통 야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11시쯤 되는데, 다음 날에도 아침 7시쯤에는 일어나야 지각을 하지 않는다는 걸 생각해보면 도무지 코딩을 할 여유가 생기질 않는다. 특히나 프로그래밍같이 긴 시간 동안 높은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활동은 2시간씩 3번 나눠서 하는 것보다 6시간을 연속해서 했을 때 훨씬 뛰어난 결과를 얻을 수 있는데 그렇게 했다간 다음 날 학교에서 하루 종일 잠만 자야 할 테니까...
그래서 고등학교 1학년 때는 딱히 코딩에 집중한 기억이 없다.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처음에 프로그래밍 동아리가 있길래 꽤 기대를 많이 했었는데 게임메이커라는 툴을 거기서 배웠긴 했지만 별로 내 취향은 아니었고(당시에 나는 좀 코딩 병에 걸려있었다. 뭐든지 직접 코드로 짜야 제대로 된 프로그램이지!! 같은, 처음 프로그래밍을 배운 사람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증상인 것 같기도) 동아리 활동 자체가 별로 적극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많이 실망을 했었다.
내 고등학교 1학년 시절은 그렇게 정말 게임 개발과는 큰 관련 없이 지나갔던 것 같다. 따지고 보자면 당시에 XNA라는 게임 개발 라이브러리가 좋다는 말을 주워듣고 일단 C# 공부를 시작했긴 했다. 그때 C# 배우고 윈폼(WinForm)이라는 툴 개발에 아주 편리한 녀석을 접한 덕분에 지금도 아주 잘 써먹고 있고. 아무튼 윈폼은 정말 쉬워서 어렵지 않게 배울 수 있었는데, XNA는 당시 내 수준에서는 이해하기가 좀 어려운 녀석이었다. 그도 그럴게, 게임 루프도 제대로 몰랐는데 XNA같이 커다란 규모의 라이브러리를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 이해할 수가 있겠는가? 나는 그다지 머리가 좋은 편은 아니었기 때문에 XNA는 결국 조금 배우다가 포기하고 말았다.
고등학교 1학년 때의 내 개발과 관련된 추억은 이게 거의 전부인 것 같다. 그 와중에 몇 가지 게임 기획을 생각해보고 조금 시도하다가 포기한 것들이 있긴 하지만, 이 것들은 나중에 실패한 게임 열전 같은 제목으로 따로 묶어서 쓰면 좋을 것 같으니 여기서는 패스.
2학년
고등학교 2학년 이후로는 다행히도 할 만한 이야기들이 많다. 고 1 때는 공부하느라 바빴지만 2학년쯤 되고 보니 슬슬 야자에도 익숙해지고, 공부도 하기 싫어져서 딴짓을 굉장히 많이 했기 때문이다. 일단 제일 큰 변화는, 내가 동아리 회장이 되었다는 것이다. 1학년 때 들었던 동아리의 회장이 된 것은 아니고, 새로 동아리를 만들었다. 원래 2학년이 되면 꼭 동아리 만들어서 내가 원하는 개발 활동을 해야지라고 굳게 마음먹고 있었기도 하고.
하지만, 나는 성격이 소심해서 차마 발품 팔아가며 동아리 할 사람을 찾아다닐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는 게 문제였다. 동아리를 만들려면 최소한 사람이 일정 이상은 있어야 하는데, 정확히 몇 명이었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필요한 숫자가 10명은 됐던 것 같다. 일단 내 주변 친구들 중에는 같이 동아리를 할 만한 애들이 없었고, 그러니 1학년 애들 중에서 사람을 모아야 하는데 1학년 교실을 돌아다니면서 사람을 모으기엔 내 용기가 너무 부족했다. 그래서 거의 포기하고 있던 찰나에, 놀랍게도 1학년 애들 몇 명이 컴퓨터 동아리 하고 싶다고 사람을 모아 와서 나한테 동아리 회장을 부탁하는 일이 벌어졌다. 동아리 회장은 반드시 2학년 이상이었기 때문에 선생님에게 2학년 중 개발 좀 할 줄 아는 사람을 물어서 찾아온 것이다. 당연히 나는 아싸 땡큐지 하고 승낙.
그게 명신고등학교 컴퓨터 동아리 Algorithm의 시작이었다.
당시 1학년 후배가 만들었던 동아리 로고. 동아리는 그때(2012년) 만들어진 이후로 지금까지도 상당히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어서 꽤 기분이 좋다. 활동이 내가 회장이었을 때에 비해서는 좀 적어졌긴 했지만 내가 졸업한 이후로도 나보다 훨씬 뛰어난 친구들이 계속 회장 자리를 맡아서 최대한 적극적으로 동아리를 이끌어 나가고 있고.
나에게 찾아온 1학년 중에서도 적극적으로 사람을 모은(그러니까 처음 동아리를 만들려고 했던) 후배는 2명이었는데, 한 명은 게임메이커를 굉장히 잘 다뤘고 다른 한 명은 C언어를 좀 할 줄 알았다. 내가 동아리를 적극적으로 나서서 만든 게 아니었기 때문에 당연히 이 친구들의 의견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몇 번 토의를 거친 끝에 동아리 활동의 방향을 정했다.
일단 첫 번째로 학교에서 주는 동아리 활동 시간의 경우 게임메이커로 진행하기로. C언어가 대충 막 배울 수 있을 만큼 쉬운 언어도 아니었고, 그냥 가볍게 동아리 활동하러 온 애들한테 그런 걸 무턱대고 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일반적인 동아리 활동의 경우 그 게임메이커 잘하는 후배에게 맡기고 게임메이커로 간단한 게임을 개발하는 방향으로 진행하고(덕분에 나도 게임메이커를 많이 배웠다), 별도로 토요일에 C언어를 배우는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당시 학교에서 토요일에 동아리 활동하는 걸 지원해주는 시스템이 있었던 덕분에 매주 코딩을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모아 C언어를 가르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자기도 별로 잘 못하면서 뭘 가르치려고 들었나 싶긴 하지만, 그래도 꽤 재밌었던 추억이다. 생각보다 코딩을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았기도 했고. 처음에 10명 정도로 시작했다가 나중에 5~6명 정도로 줄긴 했지만.
동아리 활동 외에 기억에 남는 것은 한국 정보 올림피아드라는 대회에 나갔던 일이다. 앞서 얘기했지만 프로그래밍에도 경시 대회가 있는데, 정보 올림피아드의 경우 국내에서 아마 고등학생들이 나가는 대회 중엔 제일 큰 대회가 아닌가 싶다. 아무튼 1학년 때는 신청 기간을 놓쳐서 못 나갔었는데 2학년 때는 선생님이 알려주셔서 대회를 나갈 수 있었다. 혼자서 코딩 문제는 정말 많이 풀었었지만 실제로 대회에 나가 보는 건 처음이었기 때문에 정말 많이 긴장이 됐었다. 어쩌다 보니 운이 좋아서 진짜 생각도 못하게 도대회에서 금상을 수상하고, 전국 대회까지 나갔었다. 물론 전국 대회에서 탈탈 털리긴 했지만... 뭐 나름대로는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일단 대회 자체가 재밌었고.
정보 올림피아드 대회는 "아, 프로그래밍 대회는 이런 느낌이구나! 재밌다!" 같은 느낌이었고, 이후로도 내가 프로그래밍에서 알고리즘에 대해 좀 더 깊게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됐다.
또 대회 당시에 보호자 자격으로 형이 동행했었는데, 형은 내가 문제 푸는 동안 할 게 없으니까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대회하는 곳 근처에서 NEXT라는 기관의 입시 설명회가 진행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시험이 끝난 뒤 형이 나한테 "뭐 이런 교육기관이 있다는데, 시간도 좀 남고 한 번 들어볼래?"라고 해서 나도 "뭐 음, 재밌어 보이는데 한 번 들어볼까?"싶어 입시 설명회를 들었고, 그게 내 인생에서 정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 이야기는 다음에.
아무튼 고2의 여름은 그렇게 정보 올림피아드, 그리고 거기서 알게 된 NEXT에 대한 고민 때문에 정신없이 보냈다. 그리고 가을 하면 역시, 고등학교 생활의 몇 안 되는 낙 중 하나인 축제가 있다. 우리 동아리는 축제 때 직접 만든 게임들을 전시하는 걸 목표로 했고, 본격적으로 게임 개발에 들어갔다.
나는 게임메이커로 간단하게 리듬 게임을 하나 만들었었는데, 노트가 화면 양쪽에서 가운데로 떨어지는 형태의 게임이라 극악의 난이도로 욕을 많이 먹었다. 그 외에 축제 때 대충 게임이 3~4종류 정도? 에 공 튀기기 스테이지를 만들고 + 그걸 플레이할 수 있는 게임(툴?), C언어로 구현한 콘솔 창에서의 슬라이드 퍼즐 게임 등이 전시가 됐었다. 게임들의 경우 대부분 그 1학년에 게임메이커를 잘 다루는 학생이 만들었다는 점이 조금 아쉽다. 다른 학생들이 만든 작품도 많이 나왔으면 했는데 아무래도 배운 지 1년 만에(그것도 학교 동아리 활동 시간이라는 한정된 시간에) 뭔가를 내놓긴 좀 힘들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그때 전시된 게임들 중 점수를 겨루는 게임들은 최고점을 딴 학생에게 상품을 주고, 공 튀기기 스테이지를 만드는 게임의 경우 제일 스테이지를 잘 만든 사람에게 상품을 주는 등 다양한 이벤트들도 진행했었다. 이런 전시 포맷은 전부 1학년들이 자체적으로 만든 것들이었는데 굉장히 기특하다고 생각했었다.
공튀기기 스테이지를 만드는 게임. 전시 버전은 이 버전보다 좀 더 완성도 있는 버전이었던 것 같다.
점수 쌓기 류의 게임. 피하고 잡고 하는 종류의 게임이었던걸로 기억
C언어로 만든 슬라이드 퍼즐 게임. 완성하면 동아리 로고가 나온다!
아무튼 축제 전시는 굉장히 재밌게 잘 끝났고, 이게 좋은 전통이 되어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 것 같다. 최근에 동아리 카페에 들어가 보니 이번에는 전시용 트레일러도 만들었던데 참 대단.
2016년도 축제 트레일러. 영상도, 게임 퀄리티도 대단하다. 축제에서 최우수 체험 부스 상을 수상했다고.
3학년
그렇게 재밌었던 고2 시절이 끝나고, 입시 준비에 파묻힐 수밖에 없는 끔찍한 고등학교 3학년이 돼버리고 만다. 나는 고2 겨울 방학쯤에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NEXT에 입학하기로 마음을 굳혔었고, 아버지와의 긴 싸움과 설득 끝에 겨우겨우 NEXT 진학을 허락받게 된다. 학교에서도 선생님들이 헛짓거리하지 말고 대학 가라고 많이 말씀하셨지만... 나는 어른들 말을 듣지 않는 나쁜 아이였기 때문에 모두 무시하고 나만의 길을 갔다.
고 3 때는 사실 NEXT 입학 준비, 성적 관리, 자기소개서 쓰기 등등 여러 가지 일로 바빴기 때문에 개발 자체에는 크게 시간을 할애하지 못했다. 3학년의 경우 동아리 활동은 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동아리 회장 자리를 후배에게 물려주고 카페에서 간간히 글이나 쓰고 뭐하는지 구경하는 정도의 활동만 했다.
그리고 3학년 때도 정보 올림피아드를 나갔는데, 2학년 때는 준비도 거의 못하고 나갔는데 상을 타고 3학년 때는 정말 열심히 준비했는데 도대회도 통과하지 못하고 떨어졌다. 게다가 1학년에 굉장히 잘하는 친구가 들어와서 걔는 전국대회까지 가서 좋은 상 타오는 걸 보니 더 마음이 착잡했다. 뭐 다 나의 실력이 부족한 탓이니 어쩌겠냐만은, 입시 준비와 겹쳐서 여러모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것 같다.
NEXT는 당시에 두 번에 걸쳐서 학생을 뽑았었는데, 9월에 한 번, 그다음 해 1월인가 2월에 한 번 이렇게 두 번을 뽑았다. 나는 9월 입시에서 다행히도 꽤나 무난하게 합격을 했고, 그때부터는 입시에서 완전히 해방돼서 정말 신나게 놀았다. 다른 친구들이 입시 때문에 고생할 때 나 혼자 놀고 있으니 조금 미안하기도 했고 기분 좋기도 했고. 그때 다른 애들 공부하는데 방해되지 않게 자리도 혼자 교실 맨 뒷자리로 옮겼었다. 선생님들이 수업 때 딴짓 해도 아무 말 안 했기 때문에 책도 많이 보고, 잠도 많이 자고, 공책에다가 이런저런 게임 기획도 많이 끄적였다. 그때 끄적였던 게임 아이디어 중 하나가 몇 년 뒤에 출시까지 이어지게 되는데.. 그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11월에 다른 친구들이 수능 칠 때까지 그렇게 2개월간을 아무 생각 없이 진짜 신나게 놀았다. 야자도 안 하고 집으로 바로 갔었는데 그때 뭐했는지 제대로 기억도 안 날 정도니까.
당시에 NEXT에서 입학생 전원에게 공짜로 나눠주었던 맥북. 수능이 끝나고 나서는 이제 전부 다 놀자판인 분위기니, 아예 학교에 맥북을 들고 가서 가지고 놀았다. 다른 애들이 보고 있는 상황에서 개발하기는 좀 부끄러웠기 때문에 개발을 하지는 못했고 거의 게임을 했었다. 반에서 다른 친구들도 학교에 플스니 뭐니 갖고 와서 진짜 학교 마칠 때까지 신나게 놀았던 것 같다. 그렇게 한 1주일쯤 놀다가, 아무래도 그냥 놀기만 하는 게 좀 아쉬워서, 같은 반 친구들 몇 명을 모아다가 C언어를 가르쳐줬었다. 선생님들한테 허락받고 건물 1층에 안 쓰는 교실에서 애들 모아놓고 수업을 했었는데, 그때 나한테 C언어 수업을 들었던 애들이 나중에 대학교 가서 그 과목 A 받았다는 말을 많이 해줘서 꽤 뿌듯했었다. 시간이 한 달 정도밖에 없었어서 사실 모든 파트를 다루진 못했고 포인터, 구조체 쪽 이야기를 하다가 흐지부지 됐었는데(포인터에서 애 먹는 애들이 많아서 시간을 좀 많이 썼던 것 같다) 그래도 도움이 많이 됐다고 하니 정말 다행.
그렇게 고 3 한 해는 무난 무난하게 지나가고, 나는 NEXT에 입학하기 위해 상경하게 된다.
이 이야기는 다음 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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